사두 썬다싱

[스크랩]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생활 - 제1장 그리스도 없는 미신자(未信者)의 생활<2-2>

김 열 2011. 11. 6. 12:32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생활

 

제 1 장 그리스도 없는 미신자(未信者)의 생활 <2-2>

 

 

한 사람의 산야시

 

어떤 날 나는 베나레스에서 교양있는 인도교의 산야시(주: 산야시는 생애의 중도에서 그 몸을 종교적 행사에 바친 사람) 한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는 말하였다.

"사두 또는 산야시를 위하여 마련된 옛 규칙은 참으로 존경할만 하오.

즉 최초에 할 일은 학생이 되는 일이며 다음은 집을 갖는 일, 가정생활로부터 물러 난 후에는 삼림을 돌보는 일, 그리고 늙어지면 산야시나 속세를 떠난 사람이 되는 일이요.

그런데 당신은 그 젊은 나이로서 산야시가 되려고 하는 것은 정말 묘한 길을 택한 것이라 하겠소."

 

"나는 당신의 방법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위한 사두가 된 동기는 당신과 전혀 다릅니다. 나는 어떤 공적이나 도움을 얻으려고 생각하여 사두가 된 것은 아닙니다. 나는 세상의 장애가 없이 사두로서의 단순한 길을 따라 은혜로써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에 봉사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주님에게 젊고 힘 있는 가장 좋은 시절을 바쳐 봉사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당신의 제자가 잘 익고 물이 많은 망고를 드리는 대신에 물이 말라 빠지고 껍질과 알맹이 뿐인 것을 당신에게 드린다면 무어라 하겠습니까?"

 

그는

"그런 일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며 가장 무례하고 모욕적인 일이라."고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만약 당신이 젊은 시절을 제 자신의 쾌락을 위해 소비하고 그 후 늙어빠진 거죽과 뼈로 하나님의 일에 이바지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용서 못할 일이 되지 않을까요?

 

"남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소.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쾌락, 분노, 하나님에의 봉사 등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우리들 자신의 가루마(行業)에 의한 것입니다."

 

이 말에 비하여 볼 때 그리스도의 황금율(黃金律)인

"네 마음을 다 하고 목숨을 다 하고 뜻을 다 하고 힘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막 12:30-31)하신 말씀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생각하여 보라.

 

만일 우리들이 자기 생애에 이 정신을 채용한다면 자기주의에 흐를 수 없으며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가지며 우리들 서로의 사이는 참된 형제자매의 관계가 될 것이다.

 

이 성경구절 속에서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적 교훈의 중심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여 온 몇 사람의 사두의 생애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서 그 모든 시간을 영적인 또는 종교적인 의무에 바쳐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몇백만의 다른 인도인도 역시 이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깐디와 같은 지도자도 아직껏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는 실패하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그것은 그가 자서전에서 "나는 아직 하나님을 발견치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를 구(求)하고 있다"고 말하였으며

또 "내가 아직도 하나님으로부터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나의 끊임없는 고민이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한 스와라지스트

 

그들 자신의 종교나 노력에 의하여 마음의 만족을 찾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모든 종교에 무관심하던가 또는 아주 잊어버리는 자가 있다. 한 스와라지스트(주: 스와라지는 자기지배)의 지도자 되는 사람이 나에게 말하였다.

 

"나는 인도교의 경전을 읽지 않았을 때는 열열한 인도교 신자였소. 그러나 내가 페타교와 다른 서적을 연구하는 동안에 내가 기대하는 것을 찾을 수 없었으며 그 중의 많은 종파적 싸움의 설교가 나를 혼란케 했습니다. 다른 많은 인도교 신자들도 또한 혼미속에 바지게 되었습니다.

 

나의 의견은 우리가 모든 종교를 버리고 스와라지를 얻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몇천년 동안의 종교는 그 마아야(미망:迷妄)의 가르침에 의하여 우리를 딴 나라의 노예로 만들었기 때문이며, 지금은 우리가 그 노예의 경우에서 스스로를 해방해야 할 가장 적절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에게 말 하였다.

"죄의 노예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므로 우리는 우선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스와라지의 권리를 얻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들 지배하는 권리를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의심을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의를 버리면 우리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이 곳의 지방자치권을 가진다 해도 만약 그리스도가 없으면 자가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때에야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더할 것입니다. (마6:33)

 

그러나 나의 의견에 그는 흥미를 기울이지 않고 그저 되풀이 하여 말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자치권을 얻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종교도 사람들의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와 함게 있던 한 사람이 이와 같이 의견을 말하였다.

"나는 인도교도, 그리스도교도 아니며 개혁된 마호메트교 신자지만 충분히 공평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인도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자유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소. 우리가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멀고 먼 나그네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되오."

 

다시 우리는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 중에서 실상을 알아 보고자 한다.

 

 

한 불교 은자(佛交 隱者)

 

어떤 날 티베트에서 내가 기독교의 수도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이 나라에도 또한 많은 은자(隱者)가 있는 것을 알리며 저 쪽 산에 있는 동굴 속에서 한 라마승이 수년동안 기도와 명상으로 지낸다고 말하였다.

 

그 승은 동굴 입구에 벽을 만들어 놓고 결단코 그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매일 한 번씩 차와 볶은 보리가루를 날라다 동굴 속에 넣어 주고 있으며 그렇게 오랫동안 어두운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장님이 되어버렸지만 그는 남은 생애를 계속 동굴 속에서 보내려고 결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한 사람과 함께 승을 보려고 산으로 갔다.

그는 기도와 명상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잠시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얼마 후 그는 우리의 요구에 응하여 벽에 있는 구멍 가까이에 와서 앉았다.

 

그 구명을 통하여 좁은 방 안에 있는 그를 볼 수도 없었다. 또 그는 우리를 볼 수 없었지만 쉽게 말은 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는 나에게 어디서 왔으며 무엇때문에 왔는가고 물었다.

 

"당신은 이 고독한 명상으로 무엇을 얻었습니까? 불타(佛陀)는 당신이 기구(祈求)하는 것 같은 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았지요."

 

"나는 불타를 신으로 보고 그에게 기도를 드립니다. 내가 제 자신을 이 동굴 속에 유폐(幽閉)하고 있는 동기는 무엇을 얻으려고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모든 요구를 버리기 위해서 입니다.

 

나는 닐바나(열반), 즉 괴로움이나 평화나 그 모든 느낌과 요구의 절멸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도 암흑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그 종말이 올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부족함은 어디에 재생될 때에 전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요구와 감각의 기능을 가지고 출생한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요구가 만족함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그것을 없이 하는 것이 조물주의 뜻이었다면 그런 것을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같은 요구를 죽이는 것은 구원이 아니고 자살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에 결부되어 있습니다.

또 만약 요구를 쫓아 버리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요구를 죽이려고 하는 생각이 이미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요구가 요구를 만들어 낸다면 그런 일로 어떻게 자유나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가장 좋은 길은 이 요구를 말살하는 것이 아니고 이 요구들 주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요구를 충족시키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나도 그 가운데서 참된 구원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렇지...결국은 되어 갈대로 되어 가겠지."하고 말했으며 우리의 대화는 이것으로 끝났다.

 

 

중 국 의 사

 

언젠가 북경에 갔을 때 나의 이야기의 주제는 그리스도가 세계의 구주라는 것이었다.

 

집회가 끝났을 때 한 사람의 중국 의사가 나에게 와서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불과 2천년 전에 탄생했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공자와 같은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를 세계적인 구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공자나 다른 스승들의 교훈과 모범으로 우리는 충분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2천년 전에 이 세상에 왔다고 말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는 육으로 이 세상에 나시지 않은 먼 이전부터 세상 가운데 계셨지만 그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 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요 1:10, 8:56-58). 나는 공자나 그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국의 사실을 말해 보시오. 공자의 교훈에 의해서 국민은 얼마나 진보했으며 또 특히 당신 자신은 어떤 유익을 얻었습니까?"

 

"그 가르침은 한 입에 먹어서 곧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감화는 서서히 나타날 것입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한 입의 음식이 곧 우리 육체의 한 조각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의 미각이 병들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곧 그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단지 좋은 교훈은 금강석의 목걸이 같습니다.

 

그것을 병자의 목에 걸어준다 해도 병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단지 좋은 교훈일 뿐만 아니라 또 영이며 생명입니다(요 6:63). 그를 받아들인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은 그를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생명과 변화는 밖으로부터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입니다."

 

"받는 것이 우리 자신에 달렸다는 말은 정말입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생명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쓴 나무는 저절로 달아질 수 없으나 단나무에 접을 붙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깊은 죄에 빠진 사람도 신앙에 의하여 그리스도 속에 접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의 흐름이 그에게 들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즉 구원입니다."

 

이 때에 의사는 환자가 왔다는 전갈을 받고 떠나므로써 우리들의 회화는 끝났다.

 

 

한 교법사

 

나는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의 교법사를 만났다. 그의 사상은 넓고 자유주의적이었다.

내가 그에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리고 약속된 땅의 미래에 관해서 의견을 물으니 그는 대답하였다.

 

"내 자신으로서는 "메시야"가 오는 것과 약속된 땅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 대망(待望)이 과연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것인지 다음 세상에서 이루어지겠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이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메시야인지 또는 메시야가 따로 오는 것인지도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물론 나는 우리 국민이 혹독한 고통과 잔인성르 가지고 취급한 예수는 한 대예언자이며 그를 죽인 죄 때문에 우리가 아직도 형벌을 받으며 그 피는 우리 머리에 보답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많은 이같은 대화들을 예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충분히 예거하였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다른 나라의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접촉하여 생활하며 그들의 요구에 동정하면서 연구한 사람이면 모두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접촉 없이는 그들의 생활에 영속적인 평화나 소망이 없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 가운데는 진정한 요구가 있ㅇ며 그것은 그들이 하는 어떤 노력으로도, 또 어떤 착한 일들로도 충족할 희망이 없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2)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참된 것인가?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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