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와 종교 (신.인간.자연에 관한 명상) <5> - 썬다싱
21. 우리의 피난처인 그리스도
1 꿀벌은 꿀을 모으려고 꽃에 간다.
그러나 이 즐거운 일을 하는 동안에 때로는 거미에 물리는 일도 있다. 그 때 벌은 무감각이 도어 쉽게 거미의 밥이 된다. 마찬가지로 악마도 우리를 나쁜 장소에서 연습할 뿐만 아니라 착하고 유익하며 또 기뻐할 일을 하는 사이에 공격한다. 만약 우리의 기도가 깊지 못하면 우리의 생에는 사탄에 습격 당하여 정복될 우려가 있다.
2 죄에 의하여 양심이 마비되고 의지가 약해지며 또한 무력해진다.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은 눈 앞에 죽음이나 위험이 닥쳐 오는 것을 보며 그것을 면하려는 강한 욕구를 가지지만 무력함 때문에 그것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어느 한 겨울에 한 마리의 무서운 날짐승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향해 흐르는 시체 위에 멈춰서 분주히 먹이를 뜯고 있었다.
날짐승은 폭포 가까이에 이르자 시체를 남기고 날아가려고 했으나 발이 시체에 얼어 붙어 날 수가 없었으며 드디어는 폭포에 휩쓸려 가련한 죽음을 당했다.
3 죄의 모든 습격과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주님과의 교제 속에서 그와 같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눈이 많이 쌓이는 곳에서는 짐승, 새 모든 것이 흰 옷으로 감싸므로 그 주위의 자연과 같은 보호색으로 지켜 적의 공격을 면하게 된다.
주위가 다른 땅에서는 그 색이 또 다르다.
카메레온이나 어떤 종류의 가자미는 그 색을 한 순간에 주위의 색체와 같이 바꾸어 적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러나 맹목(盲目)한 고기들은 저의 주위를 볼 수 없으므로 색을 바꿀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변화며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보고 그를 따르므로써 우리는 그처럼 되며 언제까지나 그의 품 속에서 안전히 살고 적의 습격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다.
22. 대소(大小)의 적
1 인간이 무서워 할 적은 단지 범이나 승냥이나 구렁이 같은 큰 동물 뿐이 아니다. 현미경에 의해서만 볼 수 있는 미미한 균이 식품, 음료수, 공기를 통해 체내에 들어갈 때 더욱 위험하며 생명을 빼앗길 수도 있다.
꼭 그처럼 그저 큰 죄만이 영혼의 멸망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죄의 기원이 되는 숨은 악념(惡念)이 더욱 파괴력을 지닌다.
우리는 이 악념을 마음 속에서 제거하여 나나 남을 무서운 상태에서 해방하지 않으면 안된다.
2 우리의 체내에는 병균(박테리아)이 있는 것처럼 건강의 배종(胚種, 파고사이드)도 있다.
만약 어떤 사정으로 병균이 건강의 배종에 이길때면 사람이 병에 걸리고 그것을 적절히 돌보지 않으면 죽고 만다.
그러나 건강의 배종이 보다 강할때면 병균을 죽여 건강을 즐길 수 있다.
마찬가지고 우리의 마음속의 착한 사상이 악한 사념을 이겨 영의 건강을 도울 때는 죄의 잠식으로부터 놓여나게 된다.
이 승리는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령은 모든 선과 기쁨, 그리고 완전한 생애의 근원이다.
3 악념은 마음속에 역사하여 모든 희망을 잃게 만들며 자살까지 하게끔 그를 굴복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죽음을 당하는 대신에 악념의 사상을 죽여 승리를 얻어야 한다. 자기의 생명을 죽이기 위하여 독이나 무서운 기구를 사용하는 대신에 기도와 같은 영적 무기를 써서 악을 뿌리로부터 빼어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자신을 죽이지 않고 구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한다.
4 자기중심사상도 또한 자살의 길로 나가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남을 돕고 살도록 어떤 능력과 재지를 주시었기 때문이다. 남을 돕는 중에 새로운 기쁨을 발견하며 그것이 우리 자신을 돕는다. 이것이 우리의 내부생활의 법칙이다.
만약 우리가 남을 돕지 않는다면 이 기쁨을 잃는다. 이처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치 않는 일이다.
그같은 불순종은 우리의 양식인 기쁨을 빼앗고 만다.
이 기근이 우리들 자신을 죽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그 자신의 소득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위하여 큰 상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마음으로부터 자기중심을 버릴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싸움, 분란등은 깨끗이 없어져 세상은 변할 것이다.
모든 죄는 자기중심으로부터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는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 것이다(눅 9:23)
5 만약 우리가 남을 항상 비평하고 비난한다면 남도 나에게 대해 큰 상해를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높아지려는 교만과 남을 비판하는 일을 그치고 내 자신을 개혁하고 남에게 동정을 가지면 남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가 되고 이같이 하여 자기와 남을 이롭게 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참된 사랑의 ㅇ왕국인 약속된 땅을 물려 받게 되는 것이다.
23. 지상의 여행자 또는 기우자(寄寓者)
1 한 사람의 철학자가 세계를 돌아 다니면서 안정과 평화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곳을 찾아 다녔다. 그러나 그는 어디를 가나 죄와 슬픔, 고통, 죽음을 볼 뿐이었다.
그렇게 하여 얻은 지식과 경험에 의하여 그는 이 지상은 우리에게 영원한 그리고 참된 살 곳이 아니며 영혼 속에서 간절히 구하는 살 곳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영혼은 온전한 휴식을 찾아 낼 것이다.
2 어떤 날 한 마리의 새가 멕시코만 가까이에서 붙잡혀 850마일 되는 먼 곳에 옮겨졌다.
새장은 밀폐하여 길을 알지 못하도록 하고 옮겼는데도 그 새는 이전에 잡힌 그 장소에 날아왔던 것이다.
본능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꼭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은 잠시동안인 이 세상을 하직하면 성령의 지도와 도움으로 그가 들어가도록 예비된 영원의 집인 하늘나라에 이르게 된다.
3 한 사람의 자연주의자가 나이팅겔의 알을 추운 곳에 가지고 가서 부화시켰다.
그는 알이 새가 되었을 때 그 새는 그 곳을 자기 집으로 알고 오래 살 것으로 생각한 때문이다.
그런데 여름이 지나자 새는 그 곳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마찬가지고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어도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육체를 뒤에 남기는 때가 오자마자 우리는 영원한 내 집을 향해 날아 가는 것이다.
4 죽음이 오는 때에 영은 죽는 것이 아니다. 또 어딘가 먼 곳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며 새로운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린이가 모태에서 나오면 새로운 상태에 들어 가는 것으로써 새 생활이 시작되는 것과 흡사하다.
그러나 그가 삶을 계속하는 이 세상이 또한 장소는 전과 같다. 그처럼 육체를 나온 후의 영이 거하는데는 같다 할지라도 훨씬 뛰어난 영적상태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태 속의 어린이와 육체중의 영혼은 다같이 미래의 상태에 관하여서는 무지하다.
이것들은 그들의 눈에 숨겨져 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온 어린이는 그들이 나온 태를 볼 수 없듯이 육첼ㄹ 떠난 후의 영은 어떤 조건하에서의 경우 외에는 그가 나온 육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영계에 살며 육의 세계는 거치른 물질을 영 속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아는 태줄을 끊고 모체로부터 떨어지듯 영은 은줄(전12:6)을 끊고 육체로부터 떠난다. 어린이에 있어서의 모태, 영혼에 있어서의 육체는 다 같이 미래에의 준비를 위한 장소다.
영은 육체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거기에서 참된 목적과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24. 신앙과 순결
1 신앙이 없으면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활동할 수가 없다.
만약 우리가 서로 믿을 수 없다면 지상의 생활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모든 것이 신앙에 의하여 있는데 만약 우리들 속에 믿음의 성질과 요소를 부여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부끄럽게 여길 일이 아니겠는가? 만일 우리의 지식이 무한한 것이라면 물론 신앙이 없어도 살아나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은 극히 적은 것이며 거의 없는거나 다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항상 신앙에 의하여 서 있지 않으면 안된다. 또 다음 세상에 이르러서도 역시 우리의 지식은 무한한 것은 아니다.
신앙은 사랑처럼 영혼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넝쿨이다. 그것으로부터 가지와 잎이 생기어 풍성한 영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2 신앙에 의하여 우리는 성령의 불세례를 받는다.
이것이 아니고 물의 세례만으로는 순결과 구원을 위하여 충분치 않다.
금이나 은은 물로만 씻으면 겉만 깨끗해질 뿐이지 속에까지 미치지 못한다. 이것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하다. 영혼을 완전히 순결케 하기 위해서는 성령에 의한 불의 세례를 필요로 한다.
25. 그리스도의 계시 (啓示)
1 성령을 받는 일이 없이는 제아무리 전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랐다 하여도 그의 위대함과 신성을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제자들의 경험에 의해 명백하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낮은데서부터 불러 점차 높은 일을 맡겼으며 고기를 낚는 어부보다도 사람을 낚는 자가 되도록 끌어 올리셨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3년간 함께 생활했다. 이 세월동안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거룩한 일에 종사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에 그들의 소망은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 속에 파묻혀졌다.
제자들은 그들이 이전에 종사하던 일에 되돌아 갔다. 그러나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때때로 그들 앞에 나타나시었다.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베드로는 주님임을 알고 부끄럽게 여겨 물 속에 뛰어 들어 몸을 숨기려고 했다.
그 이유는 그가 3년 전 다른 제자들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사람을 그리스도 앞에 인도하는 큰 일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지금 그 장소에서 그 성스러운 일을 하고 있어야 할 그가 옛날의 어부로 되돌아가 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의 죽었던 소망도 또한 다시 살아났다.
그리하여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새롭게 알고 박해, 순교도 두려워 하지 않은 채 생애의 끝까지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 사명을 다하였다.
2 지금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그리스도의 능력과 신성을 경험하지 못한 신자가 많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미혹되어 헤맨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몇 세기 전에 살다가 죽은 위대하고 완전한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회개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바울에게 하신 것처럼 그 자신을 영광과 능력 속에서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들은 주님과의 교제로 성령의 힘에 의하여 충실히 주님을 섬기며 생애의 긑까지 이르는 것이다.
26. 겸 손 (謙 遜)
1 만약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와 같이 겸손하고 온유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이면서 한 사람의 종의 모습으로 온 것이다(빌 2:6-7).
우리는 내 자신의 진상이 어떤 자인지도 모르고 교만을 부리는 어리석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교만하게 되면 진리로부터 떠나 드디어는 멸망에 이른다.
우리가 남보다 진보하였다 하더라도 다이아몬드가 석탄과 같은 원소인 탄소로부터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른 상태에 놓였기 때문에 그같은 변화를 보았지만 다이아몬드가 아무리 값비싸다 해도 석탄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타버릴 수 있는 것이다.
2 우리가 절벽 위에 서서 밑을 내려다 볼 때 그것이 단지 수백척에 지나지 않아도 현기증을 느끼며 두려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을 쳐다 볼 때는 우리를 덮고 있는 넓고 높음에 대하여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우리는 위로 떨어질 수는 없지만 밑으로 떨어져서 산산히 부수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러러 볼 때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발견하며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얼굴을 하나님으로부터 돌릴 때는 실재로부터 떨어져 내려가 산산히 부수어질 위험이 있다.
27. 시간과 영원
1 참된 시간, 즉 실재와의 관계에 있는 시간, 그것은 영원이다.
우리가 늘 알고 있는 시간은 참된 시간이 지나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과거나 미래가 없고 모든 것이 현재이기 때문이다.
지혜에 있어서 무한한 실재가 앞에는 과거나 미래가 함께 그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는 존재치 않고 그저 미래로부터 과거에 날아가 버리는 것 같다.
모든 순간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미래로부터 떠나 과거로 옮겨간다.
과거나 미래도 또한 우리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범위에 있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실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실재가 아니다.
우리가 잠에서 깨었을 때에 잠 속에서 몇 시간을 지냈는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에도 시간은 그처럼 불확실하다. 슬픔과 고통중에서는 하루는 1년과 같이 여겨지며 기쁨 속에서는 1년이 하루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시간은 실재가 아니다. 실재에 있어서는 모든 경우가 참된 현실이다. 우리는 영원한 실재를 위해서 만들어졌으므로 시간에 대한 감각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2 공간에서 생긴 일이나 사물의 변화에 관련하여 연,월,시,분,초(年,月,時,分,秒) 등의 시간이라 부르는 것을 우리는 만들었다.
어떠한 사물이던지 이것을 공간 속에 내어 놓아 그 변화가 시간을 만들어 낸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때 그것이 실재이다.
변화가 끝났을 때 그것은 과거다. 변화가 일어 나려고 할 때 그것은 미래다.
사물이 변화할 때에 시간도 또한 그것과 더불어 미래나 과거 속으로 변화한다.
그러기에 실재는 그 자신에 있어서나 그것과 결부되어 있는 영원에 있어서도 변화하는 일이 없다.
3 시간은 변화하고 또 망각속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우리는 시간 속에서 행한 일은 사라지는 일이 없이 영원속에 흘러 들어 간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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