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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후의 회고 (死後의 回顧) - 제2장 성자와 철학자

김 열 2011. 11. 6. 12:21

사후의 회고 (死後의 回顧)

 

 

제 2 장 성자와 철학자

 

옛날 한 성자가 있었는데 그는 매일의 의무적인 일과를 끝내고는 밀림속의 동굴로 들어가서 명상과 기도로 몇 시간씩 보내는 것을 습관으로 삼고 있었다.

 

어떤 날 한 철학자가 그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동굴속에 한 성자가 꿇어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그는 이윽고 동굴 입구로 가까이 가서 바위를 두들기며 인기척을 냈다.

그러나 성자는 깊은 명상에 잠겨 있기 때문에 대답이 없었다.

철학자는 반시간 이상이나 기다리다가 그 곳을 떠나려고 했는데 그 때 성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를 불러 들였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침묵속에 있다가 드디어 철학자가 먼저 말을 시작하였다.

 

도적의 소굴

 

철학자 : 당신은 이 동굴이 도적의 소굴로 유명한 곳인 줄을 알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성   자 : 그렇습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동굴은 도적의 집합소지만 저에게는 피난처가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보통 일을 마치고 기도와 명상을 하고자 할 때 시중에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 방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 곳에 오면 그런 방해를 받지 않으며 조용한 가운데서 기쁨으로 주님의 성호를 찬양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 곳에서 나는 내 자신과 남을 위한 기도로 시간을 보냅니다.

 

도적들은 때때로 여기에 오지만 나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그들중의 어떤 사람은 나에게 "보십시요, 존경하는 성자여! 우리는 소경이나 바보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 위선자들로부터 빼앗은 것입니다. 그들은 강도나 도적은 아니지만 갖은 방법으로 사람들의 것을 빼앗는데 그것은 우리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나는 결코 그들의 이름을 밀고하거나 정부에 고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정부는 그들을 벌한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육신 형벌은 조금도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더 완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 앞에 그들을 위해 대신 기도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중의 어떤 사람은 중생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는 이 고독속에서도 군중속에 있는 것처럼 일을 하고 있습니다.

 

 

침묵의 신

 

조용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침묵 가운데서 그를 기다리는 것이 근본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닮은 인간도 또한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하고, 결심하는 것은 침묵속에서 행해집니다.

 

예를 들면 발명이나 발견은 침묵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모든 큰 일은 침묵속에서 시작되었으며 또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상과 계획을 말을 통하여 남에게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실 때 인간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그저 묵묵히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방황하는 인간을 부르려고 할 때는 그들에게 대하여 예언자나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면 그 자신이 육신으로 나타나 인류에게 이야기 하고 그들에 대한 구원의 사업을 끝내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눈을 뜨고 조용히 기도하고 있는 것은 나태하거나 등한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재의 대양

 

문제는 신성한 진리의 진주를 따기 위해 바다 속에 잠수하는 일이며 그것은 잠수하는 자신 뿐만이 아니라 남도 부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잠수부가 물 속에 있는 동안은 숨을 멈추지 않으면 안된다. 그처럼 기도와 명상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떨어져 침묵의 방에 들어박혀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시끄러움으로부터 잠기기 위해서는 위로부터의 성령에 의한 기도의 호흡을 상상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영적 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철학자 : 나도 또한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그런 사실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한 주제에 대해서 될 수 있는 한 오래동안 나의 사상을 침묵속에 집중하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또 특별한 추론을 하지 않으면 근거있는 결론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성을 가지고도 나는 당신이 실재의 바다라고 말하는 침묵의 존재에 대해서 충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매우곤란합니다. 어떻게 당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력한 이론을 작성할 수 있습니까?

 

 

신존재의 논거

 

성  자 : 내가 영으로나 육으로 하나님의 계신 증거를 느끼고 또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의 존재를 아는 것만큼 확실합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하기 전에 우선 필요한 것은 자기를 아는 일이며 그 때에 우리는 인간을 자기 모습과 같이 만드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지식과 이해보다 초월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벌써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자신의 경험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며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 속에 손을 넣어 보고 불이 뜨겁다는 것을 경험하고 불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달고 오묘한 사랑의 교제에 들어가 본 그 영적경험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강하고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외적인 지식이 없어도 하나님을 느끼고 또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벙어리며 귀머거리고 소경인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15세 때 그는 촉각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손짓으로 대답하기를 "나는 이 세상의 외적인 조건으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이해와 요구로써 나를 창조하신 주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를 나의 내적은 눈으로 보며 그의 아름다운 임재를 기뻐하고 있습니다"(롬 1:16) 했습니다.

 

잘 알려지고 잇는 미국의 헬렌켈러 여사도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12세 때에 부룩스 박사가 처음으로 하나님과 그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니까

"네, 저는 이전부터 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철학자: 그렇지요.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당신과 논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버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이 세상을 미워하고 자기를 다른 모든 것보다 뛰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무엇때문에 당신은 이 세상을 버리는 것입니까?

 

 

방기의 의미

 

성  자 : 나도 논의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서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질문에 대해서는 이 세상을 미워한다거나 자기를 남보다 뛰어난다고 생각하는 일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단언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같이 생각하는 것을 금합니다.

 

다른 사람과 같이 나도 또한 연약하며 죄가 많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죄의 은혜가 나를 구원하고 또 나를 지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 못됩니다.

 

나는 결코 세상을 버리지 않았으며 또 버리려고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이 세상 속에 있는 어떠한 악도 나는 미워하며 그것을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세상을 버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만약 도시나 촌락을 떠나 밀림속에서 산다고 해도 그 밀림은 역시 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 위의 집이나 움막에 있는 동안은 그것을 버리려고 생각하는 것은 웃을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체는 어디에 가나 자연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육체적으로 죽어서 자연과의 결합으로부터 끊겨지기까지는 세상을 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지상에서의 나그네 생활을 계속하는동안 올바른 방법에 의하여 이 세상의 물질을 쓰고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따라 하늘나라의 가정에 가기 위하여 스스로 예비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철학자 : 당신의 말과 같이 자기를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자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모든 죄인처럼 연약하고 죄많은 사람으로 여겨 당신과 세상 사람들 간에 아무런 차별을 인정치 않는다면 무엇때문에 사람들은 당신을 성자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까?

 

 

쏘크라테스

 

성  자 : 당신은 아마 쏘크라테스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잇을 것입니다.

어느 때 그는 솔직히 고백해 말하기를 "나는 평생 한가지 유일한 교훈을 배웠는데 그것은 내가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에게 질문하기를 "아무 것도 모르는 일개 철학자라면 당신과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한가지 뿐인데 그것은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그 한 점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의 경우도 이와 극히 유사합니다. 나는 내가 연약하고 또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죄의 치료에 대해 조금도 모르기 때문에 죄속에서 죽어갑니다.

 

만약 사람들이 나를 성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과실이며 잘못입니다. 실제 나는 거룩하신 나의 하나님과의 교제생활을 통해 한 성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으므로 나는 결코 자신이 성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나는 언제나 강하게 나의 사랑하는 거룩하신 구주와의 교제로 모든 생각에 앞서 하늘나라의 기쁨을 받고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상위

 

철학자 : 나는 한가지 질문을 더 하겠습니다. 만약 크리스챤이 느끼는 기쁨이나 영적 경험이 어떠한 사람의 말을 가지고도 표현할 수 없다면 인간과 짐승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물론 짐승은 제가 느끼는 충동을 표현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짐승과 인간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의 의견으로서는 영적 경험은 단순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  자 : 제발 사실을 혼돈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영적 생활의 경험은 결코 공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영적인 사람들의 실제생활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고전 2:13-15)?

 

인간과 짐승의 차이점은 여러 모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깊은 영적 경험은 특별한 영적 용어로라야 표현할 수 있지만 그 밖의 충동이나 감정은 인간적인 어법과 말재주로 나타낼 수 잇습니다. 그러나 짐승은 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말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그것들은 혀가 있지만 벙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코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또 아무것도 말할 것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과 짐승과의 사이에는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짐승은 본능대로만 행동하지만 인간에게는 이성(理性)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금복조(金服鳥)는 그 둥지를 만드는데 수천년 전과 꼭 같게 만들고 있어 아무런 진보나 개조도 보이지 않고 있으나 인간은 자유로우며 진보적입니다.

그래도 배우고 노력하지 않으면 지식을 얻지도 못하고 진보도 하지 못합니다.

 

이와는 달리 동물은 아무런 가르침도 받지 않으며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꿀벌들이 어떻게 집을 짓고 꽃으로부터 꿀을 모아 오는가를 살펴 보십시요. 이같은 활동은 모두 본능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그 순서는 불변적으로 고정되어 조금의 신축성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무엇이든지 얻고자 노력하며 분투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길이 곤란과 긴장과 노력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성장하고 창조자와의 즐거운 교제와 기쁨속에 들어가며 하나님의 모습처럼 닮아가며 축복된 하늘나라에서 끝없는 기쁨을 나눠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호간의 이야기 끝에 철학자와 성자는 서로 정다웁게 끌어 안았다. 철학자는 떠나면서 "나는 또 다시 당신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하고 사라져 갔다.

성자는 그 후 얼마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 시간을 보낸 다음 남은 일과를 위하여 동굴을 떠났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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