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두 썬다싱

[스크랩]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생활 -제5장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활과 밖에 있던 생활의 나의 체험<2-1>

김 열 2011. 11. 6. 16:49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생활

 

제5장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활과 밖에 있던 생활의 나의 체험<2-1>

 

나의 어머니

 

나는 보통 시크족이라 불리우는 집에 태어났는데 인도교의 가르침이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는 그 가르침을 신봉하는 산 모범이요 또 충실한 하나의 대표자였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해뜨기 전에 일어나 목욕한 후 바가밧트.기다와 다른 인도 경전을 읽는 것을 상례로 하고 있었다.

나는 가족중 다른 사람들보다도 가장 깊이 어머니의 순결한 생활과 그 교훈에 감동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일찍 나의 행할 제일의 의무는 아침에 일어나 먼저 영적인 양식과 축복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그것이 끝난 후 비로소 조반을 먹도록 규칙을 세웠는데 그것은 나에게 깊이 명심되어 있었다.

 

가끔 내가 아침 식사를 먼저 먹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주장하면 경건한 어머니는 때로는 사랑으로 또 어떤 때는 벌을 주면서 하나님을 먼저 구하고 그 다음에 다른 것을 구하는 습관을 갖도록 내 마음에 단단히 다져 놓았다.

 

그 시절에는 아직 내가 너무 어려서 그 가치를 충분히 알 수 없었지만 그 후에 이르러 그 가치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일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어릴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가슴 깊이 심어준 어머니를 주신 것을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충분한 감사를 드릴지 모르고 있다.

 

어머니의 품 속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신학교였다. 또 어머니는 나를 한 사람의 사두로서 주를 위해 일하는데 적합하도록 잘 갖추어 놓았던 것이다.

 

 

인도철학자와 사두

 

나의 어머니는 몇 년 동안 인도의 경전에 기초하여 나를 교육한 후 한 인도철학자와 늙은 시크족의 사두에게 나를 맡겼다. 그들은 나를 가르치기 위해 매일 두 시간이나 세 시간 나의 집에 와 있었다.

 

인도철학자는 나에게 인도의 샤스다라스중에서 단순한 교훈을 뽑아서 가르쳤는데 그가 사망한 후 카시.나-트라고 부르는 다른 인도철학자가 범어(梵語)의 경전을 나에게 가르쳤다. 존경할만한 사두로 나에게 구란스 또는 시크의 경전을 가르쳤다.

 

나는 이러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의 위안을 얻은 것같이 생각되었으나 그래도 참된 평안을 얻으려는 생각이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큰 동정을 갖고 가르쳤으며 또 자유롭게 그들의 경험에서 얻은 좋은 말을 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나의 영혼이 허덕이며 구하고 있는 참된 축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고서야 어떻게 나를 도울 수 있겠는가?

 

 

나의 아버지

 

나는 한밤중까지 인도의 경전을 읽을 때가 보통이었다. 어떻게 하여서라도 영혼의 평화를 얻으려고 하는 갈망을 이루는 길이 거기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종종 이런 일을 나무라면서 "그렇게 늦게까지 읽는 것은 건강에 해롭다"고 말하였다.

 

나의 집에는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한 많은 것이 있었지만 그런 것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때때로 충고하여 말하기를 "너만한 나이의 어린이는 장난을 하느라고 다른 것을 생각할 짬이 없을 터인데 너는 왜 이런 일에 열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나이가 더 차서도 얼마든지 열중할 시간이 있는 것이야, 네가 이렇게 된 것은 너의 어머니와 사두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라"고 말씀하였다.

 

 

나와 인도철학자

 

철학자 "너의 고민은 새롭고 또 이상한 것이다. 너의 고통은 좀 더 성장하여 영적생활에 대해서 보다 많은 경험과 지식을 얻으면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렇게 번민하지 말고 너의 부친의 충고에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마 나는 그렇게 성장할 때까지 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그 뿐만 아니라 사람이 굶주리거나 목마를 때에는 연령이나 크다 작다 하는 조건으로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만약 굶주린 어린이가 빵을 달라면 그 때 너는 가서 놀아라, 네가 크게 되면 굶주림에 대한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며, 그 때면 너는 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가 배고픈 것을 참으며 논다면 즐거울 수 있겠습니까? 또 아무 것도 먹지 않고서 커질 때까지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는 당장 먹을 것을 얻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는 지금 영적 빵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모른다면 제발 어디에 가서든지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다 주십시요. 만약 어디서 그것을 얻을지를 알 수 없다면 그대로 나에게 말해 주십시요."

 

철학자 "이같은 영적은 깊은 문제는 네가 알 수 없다. 이 정도의 깊은 진리는 네가 하루 아침에 도달할 수 없단 말이다. 그것을 얻는데는 장구한 시일을 요하는 것이 근본적인 조건이 된다. 무엇때문에 너는 그 문제에 그처럼 성급한가? 만약 그 굶주림이 이 세상에서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계속 구함으로써 너는 새로 나는 다음 세상에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면서 나를 피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나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였다.

 

 

나의 사두

 

나는 또 사두에게 여러번 나의 고민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늘 대동소이했다.

그는 "그것에 대하여 번민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네가 지식을 얻는다면 이 모든 곤란은 해소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의심할 것도 없이 내가 완전하고 종국적인 지식을 얻는다면 나의 곤란한 문제가 해소될 것이 사실이지만 내가 어떻게 하여 그러한 지식을 쌓을지를 모르겠으며 지식이 진보하면 그 결과로서 요구와 곤란이 점점 더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떻게 하여 이 새로운 요구에 응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굶주리고 있는 자에게는 요구되는 것이 단순한 지식뿐이 아니고 빵입니다.

 

적은 지식이 나에게 많은 요구를 일게 한다면 더 많은 지식은 보다 많은 요구를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제는 어떻게 하여 이들 요구에 응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두 "그것은 불안전한 유한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다. 완전한 종극적인 지식이 이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며 네가 완전한 지식을 얻는다면 그 때 이 요구라든가 염원하는 것이 단순한 미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네 자신이 부라마 또는 신의 일부분이므로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아무런 요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도 고집하였다.

 

"용서하십시요.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 내가 부라마이거나 부라마의 일부분이라면 어떠한 미망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부라마에게도 미망이 깃들 수 있다면 그것은 벌써 부라마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미망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미망은 부라마보다 강한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미망은 미망이 아니라 부라마에 이길 수 있는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미망을 부라마처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게다가 그것은 모독입니다."

 

"이처럼 해서 당신은 나를 도웁는 대신에 소용돌이 속에 밀어 넣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나를 도와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 안에서 영적 기갈을 충족시켜 줄 수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최상의 감사를 바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안에 몰입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안에서 구원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아 주십시요"

 

그러자 그는 말하였다.

"얘야, 지금 이런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허무한 일이다. 때가 되면 너도 스스로 이런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시 나는 실망하였다. 나는 어디를 가나 굶주림을 채울 영적 양식을 얻지 못한 채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찾기까지 불안한 상태에 머물렀다.

 

 

거짓과 도둑질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모든 종류의 죄를 버릴 것이며, 고민에 몸부림치는 모든 사람에게 동정을 보내고 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어떤 날 아버지로부터 용돈을 받았을 때 상점으로 달려 가서 그 돈을 쓰려고 하였다. 가는 도중에서 아주 늙은 부인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지쳐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늙은이가 나에게 동냥을 구했으므로 나는 불쌍히 여겨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주었다.

 

집에 돌아오자 나는 아버지를 보고 그 늙은이에게 담요 한 장을 사 주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추위에 얼어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버지는 나를 밀쳐 버리면서 이 전에도 여러 번 그 늙은이를 도와 줬으므로 이번에는 이웃 사람들이 도울 차례라고 말하였다.

 

아버지가 도울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담요를 사 주기 위하여 아버지의 주머니에서 5루비스의 돈을 훔쳐 내었다.

 

나는 그 늙은이를 돕게 되었다고 생각하였을 때 큰 만족을 느꼈지만 한편 도둑질을 한 것을 생각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마음이 아팠다. 나의 고민은 저녁 무렵에 이르러 점점 더해졌다. 아버지가 돈이 없어진 것을 알아냈을 때 혹시 내가 집어낸 것이 아닌가고 물었으나 나는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였다.

 

형벌을 면할 수는 있었지만 나의 양심은 아주 나를 괴롭게 하여 밤새껏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아버지께로 가서 거짓말과 훔친 사실을 고백하고 돈을 도로 내놓았다. 나는 벌 받을 것을 겁내고 있었지만 그 두려움은 곧 풀렸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를 벌 주는대신 끌어 안아 어루만져 주고 눈물지으면서 말하였다.

 

"내 아들아, 나는 언제나 너를 믿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처럼 믿은 것이 잘못이 아니었다는 좋은 증거를 얻었다."

아버지는 나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늙은이를 위해 담요를 사도록 5루비스를 주고 또 과자를 사먹으라고 따로 돈을 주었다.

 

그 후부터 아버지는 무슨 일에 있어서나 내가 원하는 것을 거절한 일이 없다. 나도 또한 어떤 일이던지 양심을 저버리거나 또는 부모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려고 다짐하였다.

 

 

형제와 어머님의 사망

 

이런 일이 있은 얼마 후 어머니가 사망했으며, 수 개월 후에 형도 세상을 떠났다.

형의 성질과 마음씨는 나와 닮은 데가 많았다. 사랑하는 두 가족을 잃은 일은 나에게 아주 큰 자극을 주었으며 실망과 낙담을 느끼게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형태로 다음 세상에 태어났는지, 또 내 자신도 다음 세상에서 어떤 자가 될지를 전연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도의 종교에 있어서는 나와 같은 실의에 찬 자에게 대한 유일한 위로는 자기의 운명에 복종하며 가루마(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굴복할 따름이다.

 

 

기독교 학교

 

나의 생애에는 변화가 생겨나게 되었다.

나는 보통교육을 받기 위하여 우리 마을 란바루에 세워진 미국 장로교회 전도회의 소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 때에는 기독교에 대하여 많은 반감을 품고 있었으므로 매일의 일과로 되어 있는 성경을 읽는 일도 거부하였다.

 

나의 선생님들은 가르침에 따르도록 권하였지만 나는 단연코 반대하여 다음 해에는 학교를 퇴학하고 3마일 떨어진 산네와루에 있는 정부에서 세운 학교로 다니게 되었다.

 

나는 기독교 학교에서 배운 관계로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 나의 마음을 끌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그것을 거짓으로 여겨 반항하였다.

 

나의 의견은 굳게 정해졌으며 또 한편으로는 불안도 아주 컸으므로 어떤 날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복음서의 하나를 들어 찢었으며 그것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그 당시의 나의 사상에 따르면 복음서를 태운 일은 잘 한 일로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속의 불안은 점점 더해 갔으며, 그로부터 이틀동안은 아주 심한 비애에 잠겨졌다.

 

사흘째 날이 되어서는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새벽 세시에 일어나 목욕을 한 후에 기도를 드렸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어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나의 영혼의 불안을 없애 주십시요"

 

나는 굳게 결심하였다. 만약 이 기도가 응답이 없다면 밝기 전에 철길에 가서 들어오는 기차에 투신자살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나는 네시 반경까지 기도를 하고 구리시나나 불타, 또는 인도 종교의 어느 아바다루(化身)를 보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중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하나의 빛이 실내에 비쳐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문을 열고 그 빛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를 보려고 했으나 밖은 어디나 어둠컴컴하였다.

 

안을 뒤돌아 보니 빛은 점점 밝아지며 아주 강하게 지상에 임하여 둥근 모양을 이루었으며 그 빛 가운데 나타난 것은 내가 기대하였던 모습이 아니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였으며 내가 죽은 자로 알고 있던 분이었다.

 

나는 장차 죽게된다 하여도 그 영광과 사랑이 충만한 얼굴과 말씀하신 몇 마디의 말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왜 너는 나를 박해하는가? 보라, 나는 너를 위해 또 전 세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이다."

 

이 말씀은 영광(靈光)처럼 내 마음을 불태웠으며 나는 주님 앞에 쓰러졌다. 나의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로 충만하였으며 전 생애는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그 때부터 낡은 썬다싱은 죽고 새로운 썬다싱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종이 되려고 태어난 것이다.

 

 

박해의 시작

 

잠시 후 나는 그 때까지 잠들어 있는 아버지에게로 가서 그리스도가 나타난 일과 이제 내 자신이 하나의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을 고백하였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너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냐? 복음서를 불사른지 사흘도 채 되지 않았는데....어서 가 자거라. 바보 같은 녀석!" 하며 돌아 누었다.

 

그 후 나는 모든 가족에게 내가 지난 새벽에 체험한 일과 지금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였다. 어떤 사람은 나를 미쳤다고 했으며 또 다른 사람은 내가 꿈을 꾼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본래대로 되돌아 서지 않는 것을 보자 박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그 박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았을 때에 가졌던 서글픈 불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시작된 곤란과 박해를 참고 견디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사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이야말로 하나의 사두로서 주님을 위하여 일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그 무렵 기독교 신자가 되려고 한 두 세명의 소년이 있었다. 두 사람은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한 사람은 간나로 가서 뉴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거짓말로 그를 꾀어 집에 돌아 오게 하였는데 그 후 곧 죽었다. 그것은 분명히 독이 든 음식을 먹인 때문이었다.

 

 

신자가 거침돌

 

내가 란바루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을 때 뉴톤씨는 나에게 루도히아나의 기독교 소년 기술사에 들어가기를 권하였다.

거기에는 선교사인 웨리와 화이프등 두 박사가 있어서 아주 친절히 나를 접대해 주었으며 여러가지로 나를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신자라고 하는 소년의 비기독교적인 생활과 어떤 지방의 기독교 신자를 보았을 때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것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모두 천사와 같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생각은 처참하게도 잘못된 것이었다. 만약 내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나타남에 접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의 새로운 생명을 받지 않았다면 꺼꾸러졌을 것이고 방황하여 기독교의 적이 되는 일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가지고도 나는 그 학교와 그 곳의 신자들로부터 떠나서 하나의 사두로서 어디에나 가서 주님을 위한 일에 인도하시는대로 따르려고 결심했다.

 

여름방학동안 나는 사바츠으와 시므라에 가서 학교로 돌아 가는 대신에 세례를 받고 사두로서 복음 전도를 시작하였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서 진리를 탐구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아주 참기 어려운 고행을 기쁜 마음으로 견디고 있지만 그리스도 신자로 자부하는 사람들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천국을 전파하기 위하여 노력하는데 있어서 미신자의 탐구자들만큼 참될 것인가?

 

만약 전심을 기울였다면 전 세계는 벌써 이 전에 모두 기독교 신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명백이 이 점에 있어서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고백하지 않으면 안된다.

 

 

눈 속의 약

 

나는 그리스도와 함게 살고 그에 대한 경험을 갖게 되므로써 다음과 같은 비의(秘義)를 배우게 되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또 나의 구주로서 믿기 이전에는 그는 마치 눈 속의 약처럼 나의 영혼 속에서 역사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몰랐다. 눈은 그 속에 있는 약으로 밝아지게 되므로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을 볼 수는 없다. 나의 불안한 영혼도 그를 찾았다. 그리스도는 가까이에 계셨지만 나의 안계로부터는 숨어 계셨으며 그 자신이 나를 이끌어오게끔 시도하셨다.

 

나는 마치 어머니가 뜰의 나무 그늘에 숨었을 때의 어린애처럼 이 세상의 화원 속에 있었던 것이다. 어린아이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으며 정원 가꾸는 사람이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 와 과실을 주며 달래었다.

 

그러나 어린이는 그것을 내던지면서 "그런 것은 필요없어. 어머니가 어디 있는가 말이야!" 하고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드디어 어머니는 나무 사이로부터 나와 어린이를 안아 올려 입을 맞추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어머니 품 속에서 평안해진 어린이는 그가 요구하던 것을 찾은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우주적인 어머니는 때때로 그 모습을 이 세상의 동산에서 숨기는 때가 있는 것이다. 이 어린이처럼 어머니의 사랑 외에는 아무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자에게는 어머니도 또한 이것을 지켜 보고 그들을 팔에 안아 주며 눈물을 씻어 영원히 참된 행복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찾아 볼 것이다(사 49:15, 계 3:4).

 

 

신앙과 사랑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았을 때에는 나는 희망이 없었고 미래의 생활에 대해서 공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 앞에 있으며 주님은 공포를 사랑으로 바꾸고 희망 없는 생활을 참된 현실로 바꾸셨다.

공포는 잠깐동안이며 사랑은 영원하다.

 

신앙과 사랑은 영혼의 넝쿨이 되어 태양이신 하나님의 빛과 열을 받으면서 사랑의 주님께 매어 달려 하늘을 향하여 성장한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지 않았을 때에는 절망과 암흑 가운데서 시들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과 삶

 

부활과 생명이신 주님과의 교제에 의하여 사람들은 죄의 공포를 면하고 죽음을 이겨 영원한 생명속에 들어간다. 주님은 동시에 양쪽 세계에 거하신다.

주님은 이전에 육의 세계에 계시면서 동시에 영계에 계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섰을 때에는 창조자의 음성으로 "나사로여,  나오라!"고 말하였으며, 그의 친구의 영을 육체로부터도 아니고 무덤으로부터도 아니고 영계로부터 불러 내신 것이다.

 

따라서 이 명령을 듣자마자 영은 그 곳으로부터 무덤에, 또 육체에 되돌아 온 것이다.

 

-  계  속  -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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