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함께 한 생활
제5장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활과 밖에 있던 생활의 나의 체험<2-2>
어떤 마을에서의 경험
남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거듭난 생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강제로 이끌어서가 아니라 놀라운 경험과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다. 설사 아주 큰 고통이 따르더라도 그들은 봉사하는 기쁨 속에서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어느 때 란바루의 나의 옛 집에서 2마일 떨어진 한 마을에 설교하러 나간 일이 있었다. 나는 장시간 거기서 이야기했으며 설교가 끝나기 전에 벌서 어두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나를 남겨둔 채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 갔다.
피로하고 시장하여 나는 한 나무 밑에서 쉬기로 하였다. 나는 하루종일 굶었으나 남에게 구걸하는 것은 나의 주의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그냥 참았던 것이다. 피곤하고 허기져서 나무 밑에 누워 있을 때 사탄이 다음과 같은 사상으로 나를 시험하였다.
네가 집에 있었을 때는 언제나 여러가지 위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때문에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 있으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고... 그러한 시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은 놀랄만한 평화와 기쁨으로 차 있었으며 유혹을 쳐 부수고 이겼을 뿐만 아니라 나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게끔 했으며 한밤중이 되도록 주님을 찬미하고 나중에는 내 입술로 다음과 같은 말이 넘쳐 나왔다.
"나의 가정 속에서 안락하게 지냈을 때는 이 놀랄만한 평화에 대해서는 조금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때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평안을 찾아 냈다. 이것은 이 세상이 주거나 또는 이 세상에서 취할 수도 없는 것이다."고...
사람들 가운데 어떤 자는 나의 노래에 눈을 뜨고 두 사람이 나에게로 왔다. 내가 나의 경험을 조금 이야기 했더니 아주 감동했으며 내가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눈치를 채고 곧 음식을 구하여 왔다. 나는 하나님과 그들에게 감사하고 음식을 먹은 후 잠들었다.
란바루에서의 경험
다음 날 가까운 곳의 두세마을에서 설교를 한 후 란바루로 돌아 왔다. 거기서도 사람들은 나의 설교를 귀담아 들었다.
저녁무렵이 되어 나는 나의 옛집에 찾아 들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아버지가 나를 만나는 것도, 또 집에 들여 놓는 것도 거절하였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가 되어 가명을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에 아버지는 나와서 말하였다.
"좋아, 오늘 밤은 자도 좋으나 내일 아침에는 일찍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네 얼굴을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내면 안된다."고...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내가 가족과 그릇들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떨어진 곳에 앉게 했고 음식과 물을 가져왔으나 그릇을 높이 들고 물을 부어서 내가 손을 모아 받게끔 했으며 다른 종족처럼 취급했다.
나는 그토록 나를 사랑하던 아버지가 지금은 손댈 수도 없을 정도로 나를 미워하는 이러한 취급을 보았을 때에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로 차 있었다. 나는 이러한 취급에 대하여도 또 아버지에게 감사하면서 말하였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사랑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받아 들였다고 해서 나를 버린다면 나는 그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며 부모의 사랑보다도 훨씬 큰 것입니다. 내가 믿기 전에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였으나 그는 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금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부모님들의 과거의 사랑에 감사하며 또 지금 이러한 취급에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공손히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 버렸다. 들판 가운데 이르러 나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으며 나무 밑으로 찾아가 잠을 자고 아침이 되어 나의 갈 길을 향하여 갔다.
주님의 참된 약속
나는 처음 내 마을에서 설교를 시작하여 차츰 다른 동네로 옮겨 갔으나 그 후 점점 범위가 넓어져 전 인도에 미치게 되었다. 주님은 그 자신에의 봉사를 위하여 나를 다른 나라들에 파견하셨으며 몇 년 후 나의 끊임없는 기도는 응답되어 아버지도 주님에게로 돌아 왔다.
비록 나는 여러가지 고통을 겪었으나 그것들은 모두 큰 축복에 이르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감사에 충만한 마음을 가지고 나의 경험에 비추어 말할 수 있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말씀하신 주님의 말이 문자 그대로 참되다는 것을 나의 경험으로 말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백배 뿐만이 아니라 백배를 백배한 정도의 것임을 알아 내었다.
만약에 이 약속이 채워지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약속을 등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생활에 어떤 결함이 있던가 또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어떤 다른 좋은 일을 예비(히 11:39-40)하시고 있는 것이다.
영적 경험
독일의 유명한 심리학자가 나의 영적 경험과 마음의 평화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당신이 가졌다는 영적인 평화와 만족이 성령의 임재나 그리스도의 내재에 의한 것이라는 증거는 어디 있습니까? 또 그것이 주관적인 것이 아니고 객관적인 사실이란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들 속에 굶주림이나 갈증이 있는 것은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음식물과 물과 같은 것이 함께 실재한다는 증거입니다. 이 세상의 길고 긴 세월속에서 단순히 상상만으로 그의 굶주림과 갈증을 만족시켰다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이 그저 잠시동안 배고픔을 잊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암시만에 의한 주관적인 마음의 작용에서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자기 암시만으로 전생애에 걸쳐 충분한 영의 만족과 평화를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오직 영적 기갈을 창조하신 자 안에서만 영구히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들이 그와의 자각적인 합일에서 살고 주님으로부터 마음의 만족을 얻을 때에는 우리가 이처럼 열열히 구하여 온 실재를 드디어 얻었다는 것을 우리의 전 존재가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그 교회
외국전도회사에 흥미를 가지고 보조하고 있던 한 독일 신사가 나에게 물었다.
"만약 전 인도가 기독교 신자의 나라가 도려면 어떤 형식의 교회 조직이 적당할 것입니까?"
나는 대답하였다.
"전 세계에 아직 전부 기독교 신자라고 할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또 이후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도 사람이 모두 기독교 신자가 된다 하더라도 역시 서양의 기독교 국가들의 연장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계속되는 한 선과 악, 열심과 무관심은 항상 있겠기에 말입니다. 혹시나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생활이 변화하였다면 우리들은 천국이 왔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때는 이 세상이 아니고 하늘나라가 된 때입니다."
"교회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배의 형식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교파가 생겨나고 있는데 그것들의 하나 하나에 대해 전부 만족하고는 있지 않습니다. 참다운 요구는 우리들이 새로운 형식을 채용하는 일이 아니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수가 우리를 통해 흘러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히마리아 산중의 계곡을 흐르는 물이 평원에 이르면 사람들은 그 물이 흘러 내려 가도록 운하를 팝니다. 그러나 산맥 속에서는 물이 저절로 바위나 계곡을 통과하여 길을 만들어 흘러 가므로 누구나 운하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종족 사이에 흘러 갈 때 그들은 여러개의 운하를 파며 또 그들의 요구에 응할 수 있는 몇 개의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인간이 만든 교파는 없어지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가 되며 하나의 무리, 하나의 목자로 될 것입니다."
철학자와 성자
비록 어떤 나라라도 국민 전체가 기독자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는 없지만 그러나 그 중에는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기독자도 많다.
그들은 칭찬받아도 뽐내지 않고 비판 받아도 낙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듣기 좋은 말 속에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안다. 주님이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눅 6:26) 하신 그 말씀대로다. 왜냐하면 칭찬은 영적 진보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비평을 들을 때에는 이 위험이 없다. 참됨은 지나친 칭찬 속에도 또 지나친 욕설속에도 없으며 그 중간에 있다.
어느 때 한 철학자가 성자에게 가서 질문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사람들은 당신을 성자라고 부릅니까"
"사랑과 존경하는 뜻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나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어떤 상위점이 있습니까?"
"아마 당신은 소크라테스가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라고 한 말을 아시겠지요? 그 때 질문자는 만냑 당신이 철학자이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면 당신과 무지한 사람들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하니 소크라테스는 대답하기를 적어도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자기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고 말하였다.
성자는 이어 말하였다.
"이같은 것이 나와 사람들과의 다른 점입니다. 나는 죄인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무관심합니다."
빛과 어두움
우리는 언제나 깨어서 깊이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속의 빛이 어두워지면 그 어두움은 얼마나 큰 것이 될 것인가?(마 6:23).
비록 우리의 눈은 적은 것이지만 크고 작은것, 멀고 가까운 것을 볼 수 있다.
눈동자가 병들 때에는 눈 속에 어두움이 생길 뿐만 아니라 온 누리가 캄캄하여진다.
그러므로 우리들 속의 빛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빛나서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를 우러러 받들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잠 수 부
우리는 또 잠수부처럼 이 세상을 살아 가는 것이 필요하다.
잠수부가 태평양 바다 밑에 진주를 캐려고 들어갈 때에는 폐 속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호흡을 멈추고 있던가 또는 그들이 수중에 있는동안은 공기관을 통하여 공기를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그 두 종류의 잠수부처럼 세상의 공기를 호흡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위하여 이 세상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안된다. 또 기도의 관을 통하여 영원의 하나님에게 이르기 위하여 성령을 호흡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한다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서부터 구원의 존귀한 진주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또 그리스도 밖에
결말에 즈음하여 내 자신의 경험에서 이런 말을 하고 싶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았을 때의 나는 물을 벗어난 고기나 물 속에 들어간 새와 같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나는 사랑의 대양 속에 있다. 또 이 세상 가운데 있지만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다(엡 2:5-6).
이 모든 것 때문에 찬미와 영광과 감사가 영원토록 주님에게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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