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함께 한 생활
제4장 그리스도와 함께 한 신자 <2-1>
하나님에 대한 인식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기 전에 죄로 인하여 죽은 우리의 영적 힘과 내적 감각이 새로운 생명으로 각성될 필요가 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한 장님이 점자로 된 성경을 읽으려고 손을 움직였지만 손가락 끝이 얼어 한 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화로있는 데로 가서 손을 비비면서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하니까 손이 자유롭게 되어 점자를 읽을 수 있었다.
이처럼 기도와 명상중에 하나님의 성령의 불이 우리의 내적 감각을 힘입게 하며 또 따뜻이 하여 하나님을 느끼며 그 거룩한 임재를 기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매개자 없는 계시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영은 말의 도움이 없이 우리에게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또 나타내신다. 우리가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었을 때 영의 말씀은 우리의 모국어가 되며 어린이들이 쉽게 모국어를 이해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것을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언어를 사용하여 그 뜻을 옮기는 것이지만 영적인 사람은 진리를 어떠한 말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만약 우리의 모국어가 영어일 경우 범어(梵語)의 신이란 말을 가르치려면 이스와루가 신이란 뜻임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신이란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아무런 말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마음속에 들어 와 있었던 것이다.
그 사상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소경이고 귀머거리며 벙어리인 헬렌 켈러 여사는 어떤 인간의 말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기에 앞서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만약 이러한 지식이 직접 계시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어두움 속의 종자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즉시 그의 생활과 활동은 전의 상태와 달라진다.
그와 동시에 이 세상 사람들은 그를 괴상한 바보로 알고 반대하며 박해하기 시작한다 (요 15:19, 딤후 3:12).
이 세상의 반대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종류의 곤란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행 14:22, 고후 12:7-17).
그것은 곤란을 통과하여 완전에 이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란과 분투가 우리를 위해 좋은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에서 그런 것을 아주 없애 버리실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우리가 은총을 향하여 성장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것에 대항하여 노력하게끔 하기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슬픔과 고뇌로부터 아주 떼어 놓기를 원치 않으시고 또 그러한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하여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때문에 우리가 그 고난으로부터 아주 떨어지는 것을 원할 것인가? 땅 속에 뿌려진 보리 알을 보라. 어두움 속에서 나날이 위를 향하여 자라고 있으며, 드디어는 그 싹이 땅 위에 나와 열매맺는 일에 도움을 주는 빛과 열이 있는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죽는 것과 사는 것
이 세상에서도 밤이 불과 몇시간 밖에 없는 곳과 몇 달 계속되는 곳이 있다. 그처럼 우리의 생애에는 기쁜 때와 슬픈 때가 있다.
우리는 모두 필옅코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생애에 있어서 십자가를 진 사람은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살고 있다"(고후 6:9)고 말할 수 있다. 마치 나무가 겨울에 잎사귀를 잃고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봄이 되면 새로운 생명이 솟아나 잎이 다시 피어나는 것과 같다.
그처럼 크리스챤도 박해를 받을 때에는 죽은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몇 번이고 그 생명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여러가지 고통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게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열대지방의 따뜻한 해류가 흘러서 엄동설한의 유럽 연안을 추위로부터 구해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은 참된 크리스챤의 생활을 통하여 흐르며 그들을 항상 영적 건강과 행복의 성장속에서 보호하는 것이다.
슬픔속에서의 기쁨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참된 크리스챤의 생활은 세상의 박해때문에 슬픔을 당하더라도 그 슬픔은 그들을 때려 뉘울만한 힘이 없다. 그것은 모든 박해속에 있더라도 크리스챤은 곧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게 있는 것을 자각할 때 그 "슬픔은 변하여 기쁨이 되기"때문이다(요16:20).
이것은 슬픔이 끝난 때문이라던지 또는 그것이 지난 다음에 기쁨이 더해 온다는 것이 아니랄만한 기쁨이 넘쳐 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기쁨이라면 그것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집어갈 수도 있으나 이 놀랄만한 기쁨은 아무도 그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다. 한 두 사람뿐만 아니라 몇백만의 순교자가 그들의 생애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주신 짐은 가벼우며 그 멍에는 쉽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기적적인 역사로써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였다.
참된 평화가 오는 것은 그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이 있을 때며 그것이 없어진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사람은 이 놀랄만한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며 또 그것을 믿을수도 없다 (사 13:41).
기교적인 기쁨과 참된 기쁨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술에 취해서 슬픔을 잊으려고 하며 또 잠간 사이에 지나가는 흥분과 기쁨을 취하려고 한다. 그들은 이 순간적인 흥분제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만드신 창조주 안에서 찾는 기쁨은 그보다 훨씬 초월하고 또 오래 계속되는 것이라는데 대하여서는 충분한 음미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만드신 창조주 안에서 찾는 기쁨은 그보다 훨씬 초월하고 또 오래 계속되는 것이라는데 대하여서는 충분한 음미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한 번 주님 안에서 얻는 기쁨을 맛본다면 다시는 그 귀중한 시간을 피조물 가운데 있는 잠시 동안의 기교적인 쾌락을 찾기 위하여 허비하지 않을 것이다.
회개한 술꾼
세상의 어리석음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룩한 사실과의 대조는 다음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모치.랄"이라고 불리우는 한 사나이가 술에 취하면 갖가지 어리석고 나쁜 짓을 행하였다. 그의 이웃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그를 이용하고 부려먹기 위하여 그가 하는 일을 추켜 주면서 갈채를 보냈다.
그는 제 자신이 결코 크리스챤과는 교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어떤 날 참된 하나님의 종과 함게 유숙하게 되었다. 그 크리스챤의 순결하고 착한 생활은 그에게 깊은 감화를 주어 그의 생활은 근본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웃과 친척들은 그이 생활이 크게 변화한 것을 보고 노하여 그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저 자가 제 자신을 더럽히고 모든 종교를 버렸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그는 "나는 당신들에 대해서 놀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내가 주정하고 방탕하게 살 때에는 나를 반대하지 않고 내가 지금 악의 생활에서 회개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았는데 내가 제 자신을 더럽히고 있다고 말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이웃 사람들은 아무리 하여도 그의 신앙심을 버리게 할 수 없는 것을 알고 그를 계급과 가정으로부터 추방하여 버렸다. 그는 아무런 불평이 없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그의 동포를 위하여 전도의 길에 나섰다.
그는 강을 건너 다른 마을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 강은 아주 넓었으며 배가 겨우 강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문득 질풍이 불어와 배가 전복되고 몇 명은 익사하였다.
"모치.랄"은 헤엄을 쳐서 건너편 뚝에 겨우 기어 올라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집에서 추방되고 배가 전복되어 가졌던 물건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그의 주머니에는 불과 5, 6 루비스밖에 없었다.
게다가 뚝 가까이의 밀림 속에서 도둑 무리들이 나타나 그 돈마저 몽땅 털리고 말았다.
집과 친구. 그리고 돈으로부터도 완전히 떨어져 그는 이 세상에서 홀로 남은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때에 그가 만약 살아계신 그리스도에 의한 새로운 생활경험을 갖지 않았다면 그는 실망으로 압도되었을 것이다.
외면으로 보면 그는 모든 것을 빼앗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주님의 거룩한 품 속에서 찾은 평화와 자각은 무엇으로도 그로부터 빼앗아 갈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의 신상 이야기를 도둑들에게 하니 그들은 아주 감동하였다. 그는 마음 속에 충만한 기쁨과 평화를 가지고 눈물지으며 도둑들에게 말하였다.
"모든 물건은 잃었으나 아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참된 재산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
도둑들은 이 말을 듣고 그의 돈을 돌려 주었으며 그는 마을로 나가 유숙하면서 노동을 하며 생활하고 힘을 다 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하였다.
크리스챤인 한 숙녀
많은 시간을 주님을 위하여 바친 한 기독교 신자인 부인이 병에 걸려 불구자가 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18년 동안이나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 그녀의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의 고통에 대해서 동정하면서 사랑과 인내로 그녀를 돌보아 주었다. 그녀의 가장 큰 슬픔은 주님을 위하여 봉사할 기회가 없는 것으로써 만약 건강하다면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일을 할 것인가 하는 것과 자기 때문에 남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는 무가지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각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 기도생활로 건강할 때에 한 것보다 더 많은 감화를 사람들에게 주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 위에 감미로운 향기를 내 뿜는 꽃처럼 누워 있었다. 그녀를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 오는 사람들은 자기가 그녀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그녀의 맑고 아름다운 것에 화하여 향기로와졌다.
이 조용한 감화력이 아주 큰 영향을 미쳐서 기독교의 진리를 부정하는 한 사람이 그녀가 해마다 평화와 행복한 가운데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그의 생애에는 어떤 깊은 사실이 있을 것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단순하고 형식적인 신앙으로서는 이같은 장시일에 걸친 평화를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흥미를 가지고 복음서와 그리스도전을 연구하였으며 얼마 뒤에는 그 진리를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그 부인에게 가서 "나는 다른 방법에 의하지 않고 그저 당신의 생활을 보는 것으로써 우리의 살아 계신 주님의 구원의 힘과 기독교의 진리를 알게 되리라고는 정말 생각지 못했습니다. 나는 훌륭한 설교에 의해서도 또 신학자의 이로정연한 강론에 의해서도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놀랄만한 기독교 신자로서의 생활이 나에게 그리스도를 강하게 증명했으며 모든 철학적인 논증이 해낼 수 없었던 산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
당신이 만약 전강했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만약 그러한 생각이 옳은 일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건강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연약한 가운데서 당신은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봉사를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하나의 병환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같은 상태는 다른 모든 방법보다도 당신에게는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의 자리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고 증명하는 자리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부인은 자기의 병이 나사로의 죽음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을 때에 기왕에 가지고 있었던 놀랄만한 기쁨은 한층 더해갔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녀의 무거운 십자가는 그녀 자신에게나 다른 여러 사람에게도 축복이었다는 것을 증거하였다.
알메니아의 한 목사
얼마 전 나는 알메니아의 하 목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몇 해 전에 알메니아인 학살사건 때 그 가운데 있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참된 크리스챤 수천명이 나의 목전에서 죽어 갔으며 또 나 자신도 심한 상처를 입어 죽은 것으로 알고 버려졌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무섭고 참담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과 동시에 아주 큰 기쁨이 그것과 교차되었습니다. 념녀노소 모두가 참혹하게 학살되었으며 조그마한 연민의 정도 없었는데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힘이 모든 사람들 위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살인하던 자들도 그 모습을 보고 모두 놀랐습니다. 그리스도의 힘은 각자에 필요에 응하여 주어졌으며 어떤 사람은 아주 명료하게 그리스도를 보았고 또 어떤 자는 천사를 보아 큰 기쁨을 가지고 그들의 영혼을 주님의 보호 속에 맡겼습니다.
실제 그 날은 학살의 날이 아니고 잔치날이었습니다. 나는 여러 순교자들과 함게 죽는 것을 원했지만 아직 살아 남아서 이 세상에서 봉사하게 된 것도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순교자들 가운데서 끄집어 내어 한 장소에 놓으셨습니다. 거기서 몇 달 있는 사이에 상처도 나아 다시 주님의 일을 하려고 준비했습니다."
알메니아의 다른 친구들로부터도 그가 경험한 것과 같은 편지들을 받았으나 그 편지를 여기서 인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 여러가지 놀랄만한 일들을 크리스챤의 생활에서의 진리와 증명으로서 들 수 있다. 실제적으로 각국 각 민족중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측량할 수 없는 축복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생활을 보내고 있는 남녀가 있다.
신자에게 있어서 "보라, 나는 항상 너희들과 함께 있다." 하신 주님의 귀한 약속을 경험으로써 가지는 일은 얼마나 참된 위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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