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함께 한 생활
부 록
내 적 생 활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보이지 않는 숨겨진 실재다.
비록 생명은 외부에 나타나되 그것은 생명의 활동이며 한 부분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무신론자가 생명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 그것을 그저 물질에 귀착시켜 버린다. 그러나 생명의 기원은 생명이지 생명이 없는 물질이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단지 생명의 근원에 대하며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자만이 이 비밀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피조물이든 그것의 참된 내적 생명을 잡을 수 없다. 그것은 생명이 그 물체 자체의 부분적인 표현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영적 생명의 충분한 표현은 단지 영계에 있어서만이 가능한 것이며 이 물질세계는 그것을 속속들이 표현하기에는 불완전하다.
예를 들면, 우리는 동물을 안다고 하여도 그저 외면으로 알 뿐이다.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한다. 짐승은 온도와 운동과 성장, 그리고 그 생명의 외면 현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보는 이러한 것은 그저 외부에의 나타냄과 외측인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물체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그 물체를 그저 밖에서 보아서 아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 살아야만 우리의 필요와 수용량에 따라서 그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된다.
그를 알게 되므로써 그 모양에 닮게 만들어진 우리들 자신과 또 우리들의 내적 생명의 참된 성질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기주의의 정신은 우리가 실재를 알기 위한 지식에 이르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는 카-네 아디스가 그의 스승에게 "만약 내가 올바르게 추론했다면 당신이 잘못입니다. 그러나 만약 올바르지 못하다면 오! 다이오제니스여 그 때는 내가 수업을 위해 지불한 30을 나에게 돌려 주시요"하고 말한 것 같은 태도를 취하여서는 안된다. 카-네아디스는 자기의 잘못을 승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그의 스승에게 죄가 돌아가도록 생각해 내었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올바를 때에도 그의 스승은 나빠질 것이며 또 제 자신이 나빴을 경우라도 스승의 가르침이 나빴다는 것을 알리려고 한 것이다.
내적 생활의 깊은 경험을 설명하는 것은 아주 곤란한 일로서 "최고의 것은 말할 수 없다"고 한 괴테의 말과 같다.
그러나 그것을 즐기며 행위 속에 넣을 수는 있다. 이것이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떤 날 나는 명상과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꼈고 하늘나라의 기쁨으로 마음이 넘쳐있게 되어 슬픔과 괴로움이 많은 이 세상 가운데 큰 기쁨의 광맥이 숨겨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경험한 사람도 그것을 적당히 확신시키도록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가까운 마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려고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나의 육체는 병들어서 영과 육체와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영은 가는 것을 요구하고 육체는 뒤로 끌어 다녔다.
그렇지만 드디어 나는 이기어 병든 육체를 이끌고 마을로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지금 나에게 무엇을 하셨으며 또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였다. 그들은 내가 병든 몸을 이끌고 내가 애써 그들과 이야기 하려는 것을 보고 내 마음 속에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처럼 나는 내 자신이 그리스도의 임재가 무엇인가를 말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같은 나의 행동에 의하여 사람들은 내 마음에 가진 바 은혜의 증거를 받은 것이다. 입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에 행위를 통하여 나타나며 거기에 생명이 실재를 나타내는 것은 성 바울이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곤충은 그들의 안테나를 가지고 주위의 것을 느끼며 해로운 것과 필요한 것을 구별한다. 그처럼 영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내적 감각을 가지고 위험하고 파멸로 이끄는 것을 피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우며 생명을 주는 현재를 기뻐하고 축복에 찬 경험에 의하여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촉진시킨다.
"언제나 영혼이 그 자신에게 돌아올 때 또는 자연스럽고 건전한 어떤 것을 얻었을 때에 하나님께 대한 것을 말한다"고 데드토리안이 말한 것과 같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많거나 적거나 간에 내적인 수용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으로 영적인 진리를 지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모른다. 어떤 사람이 "그들은 어떻게 하여 변하였는지를 알지 못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말한 것과 같다.
예컨대 고르반(1804-1840)은 여섯살 때에 11년 동안이면 몇 초나 되겠는가 질문을 받았을 때 4초 사이에 정확한 대답을 하였다. 질문한 사람이 어떻게 하여 답을 얻었는가고 물으니 소년은 어떻게 하였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하면서, 자기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마음 속에 답이 나타난 것 뿐이라고 말하였다. 마치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 자신의 뜻에 따라 살려고 하는 자에게 영적인 사실을 제시하시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살고자 하는 의지는 생명을 완전한 상태로 촉진시키려는 하나의 충동이며 그 생명을 위하여 목적에 합당한 상태에 들어간다. 거기에서 생명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 때 그는 하나님 안에 있으며 영원히 행복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에 찬 내적 생활의 경험을 갖지 못한 자에게 있어서는 생활은 무거운 짐이다.
쇼펜하우웰은 이같은 까닭에 "생존은 지옥"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이 자살하려고 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희랍의 철학자 헤게시우스의 가르침의 결과로서 몇백명의 청년이 자살을 하였다.
또 제노.엔페토크레스나 세네카와 같은 몇몇 철학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의 철학은 그들의 생명을 멸망케 한 대신에 그들을 불행하게 만든 것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이 세상의 철학이다.
설사 고생과 근심때문에 피곤한 삶을 보내고 있는 자가 살려고 하는 의지를 억제할 수 있다고 해도 그는 먹으려고 하는 의지로부터 놓여날 수는 없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이나 어떤 다른 영적인 실재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 자신의 불신앙을 믿고 있다.
삘로로는 "우리들은 우리가 확실치 못하다는 것조차 확인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내적생활이나 사람의 인격이란 것은 장소를 옮기거나 육체를 죽이는 것으로 변하게 할 수 없다. 오직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으로만이 (이처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가는 것으로만이) 변하게 할 수 있다.
방황하는 자들은 그들의 내적 요구를 창조자 가운데서 채우는 대신에 그들 자신의 비뚤어진 방법으로 채우려고 애쓴다. 그 결과는 행복과 만족을 얻지 못하고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만다.
예를 들면 행복을 얻는 수단으로서 남의 것을 훔치고 그것을 저축하는 도적은 그의 행복을 잃을 뿐만 아니라 그의 훔치는 버릇으로 행복에 대한 수용량까지도 멸망되어 간다. 그 수용량은 범죄로 인하여 죽어 있는 것이다.
또 만약에 그가 훔치는 것이 범죄라는 감각을 잃어 그의 양심이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영적인 자살을 행한 자이다. 그는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주였을 뿐만 아니라 가능성을 가지는 영혼마저 죽인 것이다.
참된 기쁨과 평화는 재산, 왕의 권력, 또는 다른 물질적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부자는 행복하고 만족하며 살았을 것이다.
또 불타, 마하비라, 바아루다리와 같은 사람들은 그들의 왕국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참되고 영원한 것은 우리가 새롭게 거듭날 때 (영적으로) 마음속에 모셔진 하나님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축복에 찬 생활의 비밀과 사실은 그것을 받고 그 속에서 살고 또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만약 누군가가 그저 지식에 의하여서만 이것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는 그 노력이 허무하다는 것을 이윽고 알게 될 것이다.
한 과학자가 한마리의 새를 붙잡았다. 그는 그것을 한참 보다가 새의 어느 부분에 생명이 있으며 또 생명 자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새를 해부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그가 찾고 있던 그 생명은 이상하게도 숨겨져 버렸다.
내적 생활을 단순히 지식만으로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이같은 운명에 도달할 것이다. 그들이 찾으려 하고 있던 생명은 분석의 결과 꺼져버릴 것이다.
이 큰 세계에 비하면 인간의 마음은 하나의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는 이처럼 큰데도 불구하고 작은 마음을 만족시키는데도 아주 부적당하다. 인간의 언제까지나 성장해 가는 영혼과 그 수용량은 무한한 하나님에게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 물은 수면에 이르기까지는 평온할 수가 없다. 그처럼 영혼은 하나님 곁에서 쉴 때까지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물질적인 육체는 영구히 영혼과 함께 있을 수 없으며 어느 기간동안 세상의 일을 위하여 영혼의 그릇으로서 그 목적을 다한 후 육체는 그 연약함과 또 노령때문에 쇠퇴하여 끊임없이 전진하는 영혼과 함께 있는 것을 거절하기 시작한다.
그 육체는 영원히 발달하는 영혼과 함께 있으면서 걸음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영혼과 육체는 영원히 함께 있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함께 있으면서 이룬 업적은 영원히 남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하여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를 남용하여 그것을 영원히 잃는 것은 참으로 슬퍼해야 할 일이다. 자유는 선.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유를 의미한다.
끊임없이 악을 행하고자 하는 자의 죄의 노예가 도며 그의 자유와 생명을 멸한다(요 8:21-24).
이에 반하여 죄를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으로써 그는 영원히 자유롭게 된다(요 8:32). 이처럼 자유롭게 되어 그 생애를 주님을 위하여 바치는 자, 즉 주 안에서 죽는 자에게는 그가 행한 일이 그들을 따르는 것이다.
주 안에서 죽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은 "죽는 자의 주님이 아니고 살아 있는 자의 주님"인 때문이며 주 안에서 사는 것은 주님의 일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잃는 일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4).
만약 누군가가 악과 암흑속에서 살고 또 죽는다 하여도 그것은 주님의 결점은 아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비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분"(요 1:9)이기 때문이다.
선한 생애와 악한 생애는 금강석과 석탄과 같은 상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 둘은 동질인 탄소로 되어 있지만 그 사이에는 큰 자가 있다. 금강석은 빛나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햇볕을 반사하지만 석탄은 햇볕 속에서도 어둡고 둔한대로다.
그와 같이 의의 태양은 선인이나 악인의 위에서 빛나지만 그들은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반사하는 것이다. 해에 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결점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상태는 지구와 같다. 우리는 해가 저물어 우리로부터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지구가 움직여 태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만약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항상 끌리어 있지 않다면 지구는 공간 속에서 잃어졌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의의 태양도 또한 그의 사랑의 인력으로 모든 사람을 그 자신에게 끌고 계신 것이다(요 12:32).
몸 안에 있느 한 지체가 아프거나 상하였을 때에는 전신이 그것을 고치려고 분주하게 일한다.
그처럼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가 우리들 안에 계시면 그는 신으로서의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들의 죄의 상처를 고치고 건전한 영적 건강의 기쁨을 가지고 우리를 충만케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생명을 받을 때에 모든 종류의 유혹과 고난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생각하여서는 안된다.
사실은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벗어난 것이지 이 전보다도 더욱 많은 싸움과 노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전과 틀리는 점은 이전에는 모든 유혹과 고난이 참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축복과 기쁨의 수단이 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유익함)을 이루느니라"(롬 8:28).
또 분투는 우리의 숨은 능력과 성질의 진보와 완성을 위하여 필요하다. 우리에게 생명을 갖게 하신 주님은 이 성전에 있어서 승리를 얻도록 우리를 도우며 이처럼 하여 세상과 죽음과 사탄에게 이김으로써 그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될 수 있는 한 가장 선하게 이용하여야 하며 우리의 존귀한 시간을 공허하고 부주의하게 낭비하여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이 일이나 저 일은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으니까 너무 조급해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짧은 시간을 선용하지 않는다면 결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 생애를 창조주의 목적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써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소명에 따르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에 따라 일하여야 할 것이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4) 한 말씀과 같다.
같은 입김이 피리, 트럼펱 등에 불어질 때 각자의 기질과 인격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고 그것에 의하여 하나님이 숭배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어서는 내적과 외적과의 생활 사이에 근소한 조화밖에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면 얼마 후에는 내.외의 생활이 영구히 완전한 조화를 이룰 때가 올 것이다.
외부는 바르게 내부에 응하며, 내부는 바르게 외부에 적합하여 하나님의 은총에 따라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와 같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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